국군의 뿌리' 광복군 창설 80주년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 용사야/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삼천리 삼천만의 우리 동포들/건질 이 너와 나로다//원수들이 강하다고 겁을 낼 건가/우리들이 약하다고 낙심할 건가/정의의 날쌘 칼이 비끼는 곳에/이 길이 너와 나로다//(후렴)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싸우러 나가세"

항일독립군들이 1910년대부터 미국 군가 '조지아 행진곡'(Marching Through Georgia) 곡조에 노랫말을 붙여 부르던 독립군가다. 신흥무관학교 교가에 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의 군가가 됐고, 그 뿌리를 이어받은 대한민국 국군도 공식 군가로 채택해 각종 기념행사에서 부르고 있다.

일제가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침탈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국권을 빼앗긴 뒤로는 중국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겨 독립군을 결성했다. 1919년 3·1운동에 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무장투쟁의 열기가 고조됐다. 독립군 간부를 길러내는 신흥무관학교가 문을 열고 독립군 부대 간의 연합과 연대도 활발해져 1920년 봉오동·청산리대첩이라는 빛나는 전과를 거뒀다. 미국에서는 전투기 조종사 양성소인 윌로스한인비행학교까지 생겨났다.

그러나 일제의 무자비한 보복과 탄압, 러시아혁명 후 소련의 배신, 독립운동 진영의 내분, 일본군의 만주 점령 등으로 독립군 세력은 급속히 약화됐다. 김원봉의 의열단, 김구의 한인애국단, 지청천의 한국독립군, 양세봉의 조선혁명군, 공산당 계열의 동북항일연군 등이 무장투쟁의 명맥을 이어갔으나 전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임시정부는 처음부터 직속 부대를 창설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오랜 노력 끝에 장제스(蔣介石) 중국 주석의 동의와 미주 한인사회의 재정 지원 약속을 얻어내 마침내 1940년 9월 17일 광복군을 창설했다. 충칭(重慶)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열린 광복군 총사령부 출범식에서는 임시정부 김구 주석과 창군 실무를 맡은 엄항섭, 지청천 총사령, 이범석 참모장 등 30여 명이 참석했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21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지 33년 만의 일이고, 올해로 80주년을 맞는다.

1941년 1월에는 무정부주의 계열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아우르고, 1942년 7월에는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 1지대를 편입시켜 비로소 독립군 부대 통합조직의 틀을 갖췄다. 일제가 막판에 학병과 징병이란 이름으로 조선 청년들을 군대에 동원하자 중국 전선에 배치된 병사 일부가 부대를 탈출해 광복군을 찾아오기도 했고, 한중 연합군에 포로로 붙잡힌 뒤 광복군에 투신한 사례도 있었다.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하자 하루 뒤 국무회의를 열어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교부장 명의로 일본에 전쟁을 선포했다. 1951년 9월 연합국 48개국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을 종결하는 샌프란시스코조약을 체결할 때 이승만 대통령이 이를 근거로 "우리도 연합국의 일원으로 조약 서명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인정받지 못했다.

광복군은 중국군 지휘를 받아 중일전쟁에 참전하는 한편 1943년 인면전구공작대(印緬戰區工作隊)를 구성해 인도(印度)-미얀마(면전·緬甸) 전선에 파병했다. 공작대원들은 영국군에 배속돼 감청, 선무 공작, 포로 심문 등의 활동을 펼쳤다. 이때 영국군 연락장교를 맡은 캐나다 출신의 롤런드 클린턴 베이컨 대위는 한국에서 10년간 선교사로 일해 한국어가 능통했다. 국가보훈처는 그의 공로를 뒤늦게 인정해 지난달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미국 정보기관 OSS는 광복군을 국내로 잠입시킨 뒤 미군이 상륙작전을 벌일 때 안에서 돕게 하는 일명 독수리작전을 세웠다. 광복군 대원들이 일본인과 외모가 비슷하고 일본어를 잘할 뿐만 아니라 한반도 사정에 밝기 때문에 적임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1945년 5월 21일부터 1기생 50여 명이 중국 시안(西安) 근교의 비밀기지에서 OSS 교관으로부터 사격, 폭파, 침투, 독도법, 무전기 사용법 등 특수훈련을 받았다.

훈련은 8월 4일 끝났고 수료자는 38명이었다. 20여 명의 2기생 훈련도 7월 7일 시작됐다. 8월 7일 OSS 책임자 윌리엄 도너번 소장은 김구 주석, 지청천 총사령관, 이범석 2지대장에게 국내 진공작전 계획을 통보했다. 8월 20일까지 4∼5명씩 공작반 8개조를 편성한 뒤 낙하산이나 잠수정으로 한반도에 침투시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출발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일본의 항복 소식이 들려왔다. 김구 주석은 우리 손으로 해방을 이루지 못해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이 없을 것으로 예견하고 땅을 치며 탄식했다.

임시정부는 하루라도 빨리 광복군을 국내에 진입시키려고 선발대를 미군 군용기에 태워 보냈다. 이범석·장준하·김준엽·노능서 등 4명이 미군 선발대와 함께 8월 18일 서울 여의도비행장에 내렸으나 그때까지 무장을 풀지 않은 일본군의 반대에 부닥쳐 광복군들은 이튿날 중국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임시정부는 일본군에 소속된 한국인 병사를 중심으로 10만 명의 광복군을 조직해 귀국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고 서울에도 광복군 국내지구사령부를 설치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은 미군정은 '사설 군사단체 해산령'을 내려 불허했다. 광복군 자격으로 귀환할 길이 막혀버리자 지청천 사령관은 1946년 5월 16일 광복군 해체를 선언했다.

광복군은 이국땅에서 탄생했다가 이국땅에서 종언을 고하는 비운을 겪었다. 대한민국 국군은 광복군을 뿌리로 삼고 있으나 해방 후 미군정이 설립한 국방경비대를 토대로 창군하는 과정에서 일본 만주군 출신이 주류를 차지함으로써 지금까지도 친일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최근에는 광복군 1지대장 김원봉이 1948년 월북해 북한 고위 관료를 지낸 것을 두고 용공 논란도 일었다.

지난달 29일 광복군 3지대 구호대원으로 활약한 유순희 애국지사가 별세함으로써 생존 광복군 대원이 20명도 채 남지 않았다. 지하의 광복군 선열과 생존 노병들은 광복 75주년이 됐는데도 친일과 용공 문제로 다투는 후손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두렵고 죄송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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