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표

경상남도지사 - 한국

경력 및 이력

대한민국의 법조인, 정치인. 4선 국회의원을 거쳐 재선 경상남도 도지사에 재임 중이다. 경남도 출신에 경남도지사를 역임했지만 정치적으로는 TK 계열에 가깝다.# 그의 고향인 창녕군은 경상남도이지만 대구 생활권에 속하는 곳이기도 하고.[3] 검사 시절에는 그야말로 성역 없이 검찰 법무부의 수뇌부와 선배 검사 등을 줄줄이 수사했던, 당시 검찰에 몇 안 되었던 소신 검사 중의 한 사람이었다. 변호사 개업 이후 슬롯머신 사건 당시 처벌 받았던 조폭들에게 지속적으로 가족에 대한 협박을 받으면서 결국 정계 입문을 생각하게 되었고, 김영삼 대통령의 추천으로 신한국당에 입당함으로서 정치인생을 시작했다. 광주지검 시절 조폭들을 일소한 경력으로 새정치국민회의에서 영입하려 했으나 당을 깨고 나온 김대중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여 거절하고 꼬마민주당으로 입당하려 했는데 이기택 총재가 꾸물거리는 사이에 강삼재 신한국당 사무총장과 김영삼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걸어 입당을 제의하면서 신한국당에 입당하게 되었다.# 이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송파구 갑 선거구에 출마해 현역 국회의원인 조순환을 꺾고 당선되어 국회에 입성했다. 당시 젊은 나이로 주로 소장파 역할을 맡았으며, 노동 최저 연령 상향을 발의, 통과시키는 등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1999년 선거법 위반으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http://image.kmib.co.kr/online_image/2015/0509/201505090235_11120923069957_1.jpg 하지만 2년 뒤 치러진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을 보궐선거[10]에 당선되어 국회에 복귀하였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의 3남 김홍걸의 미국 은행 입출금 내역을 공개해 3달 동안 23만 달러, 1달 평균 8,700만원을 소비한 사실을 폭로하였고 검찰이 이를 수사해 최규선에게 3억 원을 수수한 혐의를 적발함으로서 김대중 정권의 최규선 게이트를 파헤치는데 공로하였다.#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탄핵 역풍을 뚫고 서울 동북권에서 홀로 살아남으면서 보수정당의 몇 안되는 서울 다선 의원으로서 단숨에 거물급으로 부상하였다. 2006년에는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서울특별시장의 경선에 나섰다. 그러나 막판에 오세훈에게 밀려서 석패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한나라당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4위로 고배를 마시고 이명박 후보를 지지해 친이계가 되었다. 5. 이명박 정부 시절[편집]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직후 열린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4선 의원이 되었고 곧바로 한나라당 원내대표로 추대되면서 이명박 정부 초기의 입법을 주도하였다. http://img.newdaily.co.kr/data/photos/20110727/art_1309775480.jpg 2011년 7월 한나라당 대표 경선에 나섰는데, 뚜렷한 조직세 없이 대표에 선출되는 기염을 토했다. 이때 대의원 유효 투표 11만 4,372표 명 중 4만 1,666표를 얻어 3만 2157표를 얻은 2위 유승민 후보를 9천여 표 차이로 이겼다. 계파없이 홀로 뛴 선거에서 저 홍준표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 대의원 동지들에게 감사드린다. 현대조선소에서 일당 800원을 받던 경비원의 아들, 고리채 사채로 머리채를 잡혀 길거리를 끌려다니던 그 어머니의 아들이 집권 여당의 대표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국민 여러분이 보여주셨다. 한나라당 대표로 선출된 후, 민주당 손학규 대표에 맞서서 한나라당의 지지세를 조금씩 회복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지지율에서 민주당에 밀리고 다음해 총선 전망도 어두워지자 결국 승부수를 던지고 말았다. 2011년 12월 “현역의원 전원의 불출마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 자기희생적이고 과감한 인재영입을 추진하겠다.” “현역의원과 당협위원장은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고 선수에 상관없이 의정활동과 조직활동으로 전원 재심사를 받도록 하겠다.” “재심사위원회는 전원 당외 인사로 구성해 공천심사위에 가기 전에 2단계로 심사를 진행하겠다”는 재창당 쇄신안을 내놓은 것. 그러한 쇄신안이 당내 모든 계파로부터 거부 당하자 대표직에서 사퇴하였다.[11]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도 동대문을에 출마하였으나 민병두 후보에게 밀려 석패하였다. 훗날 밝히기로는 자신은 원래 19대 총선에 출마할 생각이 없었는데 당에서 동대문을에 자신을 전략공천시켰다고 한다. 보수정당이 굉장히 어려운 열세지역이었기 때문에 출마할 사람이 자기밖에 없었기 때문. 홍준표는 자신의 낙선을 예감하고 이때 동대문을 지역주민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다녔다고 한다. 이명박의 실정에 분노한 서울 민심 때문에 당초에 선거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지지율이 밀리는 양상을 보였고, 그것이 당연히 패배의 결과로 이어진 것. 어쨌든 앵그리 버드를 패러디하는 동영상도 찍으며(…)[12] 나름대로 열심히 선거운동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6. 경상남도 도지사 재임[편집] http://www.newsprime.co.kr/data/photos/cdn/20161248/art_1480576287.jpg 총선에서 패배한 후 몇 달 동안 야인생활을 하다가 김두관 경남지사가 사퇴하여 경상남도 도지사 자리가 공석이 되자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과 동시에 치러진 경상남도 도지사 보궐선거에 출마했다. 거기서 야권의 권영길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어 정치적으로 완벽하게 재기했다. 이후 2014년 6월,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의 김경수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어 현재까지 재선 도지사로 연임하는 중이다. 홍준표 지사 취임 이후 3년 6개월 동안 매일 11억 원씩 총 1조 4천억 원의 채무를 도 재산 하나 건드리지 않고 행정개혁만으로 청산을 완료하면서 전국 최초의 흑자 광역지자체가 되었다. 또한 대한상공회의소에서 2년 연속으로 가장 기업하기 좋은 지역으로 선정되었고 사천시, 진주시의 항공우주산업단지, 밀양시의 나노산업단지, 거제시의 해양플랜트산업단지 등 3개의 국가산업단지를 유치하였으며 2012년 15위, 2013년 14위 등 만년 최하위권에 머물던 도의 청렴도가 2014년에 3위로 수직 상승해 2015년 2위, 2016년에는 전국 1위를 차지하는 등 성공적인 도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여러 이력 덕분에 한때는 차기 대선 후보로도 거론되었으나, 진주의료원 폐업 사태, 무상 급식 중단, 각종 막말 등 갖가지 논란으로 인해 2015년 이후 여론에서 대하는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며, 대권은 사실상 멀어졌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지역 여론도 좋지 않은 편이라 사실상 탄핵에 상응하는 주민소환까지 고려되고 있으며, 현재 ‘홍준표 경남지사 주민소환운동본부’의 주도로 주민소환투표를 청구하는 서명을 받아 선관위에게 심의를 요청한 상태이다. 주민소환은 경남 총 유권자의 10%인 27만명을 넘으면 홍준표의 소명을 받아 실시가 되는데 현재 신청 서명한 사람이 35만명이기 때문에 유력하다. 선관위에 의해 투표 공고가 나오면 투표일까지 직위는 중단된다. 이후 투표가 진행되면 총 유권자의 1/3이 투표한 가운데 과반수를 차지하면 직무가 해제된다. 만약, 해제가 되면 내년 4월 재보궐로 새로운 도지사를 뽑게 된다.# 다만 20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둔 시점이기에, 실제 주민소환이 이뤄지기 위해선 중복서명 검사 등의 필요한 절차들을 밟기 어려운 상황으로, 총선이 끝난뒤에 명단 검토 및 주민소환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7. 2017년 자유한국당 대선후보[편집] http://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t1.daumcdn.net/news/201703/31/khan/20170331192038304iozr.jpg 경남도지사 시절의 각종 논란 및 성완종 리스트 연루로 대권이 사실상 멀어진 것처럼 보였으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여파로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되어 자유한국당의 지지도가 동반 폭락하였고 바른정당과 분당 사태를 겪으면서 당내 대권주자 라인업이 극도로 초라해지게 되었다. 난립하는 당 내 경선 군소후보들 사이에서 홍준표가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율을 얻게 되었다. 2017년 3월 31일 자유한국당 대선후보 전당대회에서 총 득표율 54.2%를 기록하며 이인제, 김진태, 김관용 후보간의 경합에서 승리했다. 아무래도 대선후보 전당대회 참가자들은 박근혜 똥물을 계속 마시려는 김진태보다 박근혜와의 단절을 선언해[13] 민심을 얻으려는 홍준표 쪽이 살아남는 길이라 판단했다. 단일화에 대해서는 바른정당에게 다시 힘을 합치자고 권유하는 상황이며, 국민의당과의 단일화는 조금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홍준표가 후보가 되고 난 후 바른정당과의 보수후보 단일화는 멀어지고 있다. 홍준표가 후보가 되고 난 후 그는 친박은 없다며 오히려 친박인사를 적극 등용하고 있다. 또한, 바른정당을 향해 아무조건 없이 백기투항하라는 말을 하는가 하면 대구경북 지역 사람들은 살인자는 용서해도 배신자는 용서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하여 유승민과 바른정당을 오히려 더 자극하였다. 유승민도 홍준표에 대해 성완종 리스트와 관련한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라며 무자격 후보라고 주장하였고 비박이지만 친박의 지원을 받아 후보가 된 홍준표와의 단일화는 할 수 없다며 서로가 대립하고 있다. 홍준표가 주장하는 노태우 모델이 실제로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바른정당 후보인 유승민과의 단일화는 필수이다. 하지만 바른정당과의 통합은 유승민과 김무성을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강성 친박계의 반발을 사 시너지 효과는 커녕 자유한국당 지지기반이 날아가버린다는 딜레마에 휩싸여 있는 상황이다.[14] 바른정당 입장에서도 당시 새누리당 내에 만연한 친박 패권주의를 대차게 까며 탈당했는데 홍준표가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이면 바른정당을 창당했던 명분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 또한, 국민의당과의 연대에 대해서도 4월에는 안철수 후보의 지지율이 상승하면서 자신에게 단일화 압박이 가해지자 국민의당은 민주당 2중대에 불과하다면서 단일화의 뜻이 전혀 없음을 공고히 하기도 했다. 4월 6일에는 홍준표 "안철수 찍으면 박지원이 상왕…安 각본에 춤추는 인형"이라며 이미 돌이킬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확인시켰다. 결론적으로 홍준표는 외연 확대를 위해서는 친박을 버려야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자기 집토끼를 잃게 되는 한마디로 진퇴양난의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저서 《홍검사 당신 지금 실수하는거요》. 둥지. 1995년 12월 1일. ISBN 89-435-0010-6. 《이 시대는 그렇게 흘러가는가》. 문예당. 2000년 9월 29일. ISBN 89-85975-73-0. 《나 돌아가고 싶다》. 행복한집. 2005년 3월 15일. ISBN 89-86171-37-6. 《변방》. 형설라이프. 2009년 12월 4일. ISBN 978-89-92984-59-1. 논문 《조직폭력 수사상의 문제점》 (1993) 수상 경력 2008년 제10회 백봉신사상 신사의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