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우지시절 - 꿈은 한을 지고 내리는 비가 되어

이제는 다 녹아버렸지만 우리모두 첫눈 오는 날의 약속같은 유년의 꿈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사내아이들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되는 시절의 영향으로 은빛 별이 달린 장군이었고 섵부른 민주와 평등이 난무하는 정치과잉을 겪어서 또 다른 조무래기들은 아무렇치도 않게 그리고 함부로 대통령을 꿈꾸었다. 그러는 한편 역시 전후의 결핍을 겪어 조금이라도 실용적인 아이들이라면 그들의 꿈은 한결같이 배불뚝이 사장님이었다

물론 우리 단발머리 계집애들은 고무줄놀이를 하더라도 <무찌르자 오랑캐>를 불렀던 세대답지않게 꿈으로서는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이며 공부 꽤나 하면 큐리부인이요 소박하게는 검정 치마 하얀 저고리 단화 신은 선생님도 인기있는 장래희망이었다. 드물게 집안이 고루하면 숙영낭자라고 하여 동무들로부터 학년이 다할 때까지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고 대개는 터무니 없이 거창하게 시대를 뛰어넘는 현모양처의 사표, 신사임당을 꿈꾸던 참으로 죄없는 시절이었다

세월은 흘러 하얀카라와 자주색가방의 여고를 졸업했고 이만하면 마춤하다싶은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으며 이민을 와서 국적을 바꾸고 이땅에 세금을 바치는 동안 행여 꿈보다 후회가 많아졌다면 이 또 한 늙음의 징표가 될 것이다

요즈음 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기껏해야 어깨를 으쓱하며 shrug한다 그래도 고모라고 좁혀 물어보면 제법 구체적이고 다양하지만 실제로 내가 꿈꾸었던 시절에는 없던 전혀 생소한 직업군이니 도대체 훈수할 방법이 있을리 없다 이를테면 온라인 게이머인 경우도 있고 그래도 좀 반듯하면 Steve Jobs인 경우도 있다 만약 묻는 아이의 나이가 어리다면 Transformer, <마지막 기사>라고 대답하곤 한다 시대를 반영하는 것은 맞는데 내가 참견할 수없으니 어딘가 모르게 공허하고 나조차도 길을 잃은 속인이니 아득하기가 그지없다

어제는 32번 도로에 때를 맞추어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자동차 와이퍼가 끄덕이는 동안 느닷없는 연상이겠지만 대통령을 꿈꾸고 주렁주렁 사성장군을 꿈꾸던 아이들과 나이팅게일과 신사임당을 바라던 아이들은 지금 어느 하늘밑에서 무슨 세월의 나이테를 쌓아가고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한 개인의 능력과 그 부조화에서 오는 우울에 홀로 나만의 자괴를 섞어 <고작 이거란 말인가!>하며 한숨지어 생각해 보았다

서울의 한 신문 여론조사에서 지금의 50대 후반 베이비부머 세대에게 그러니까 그들의 꿈이 대통령이고 사성장군이거나 사장님이던 그리고 사임당과 나이팅게일을 한 때나마 품었던 그분들에게 현재의 꿈을 객관식으로 다시 물었다 현재 당신의 꿈은 다음중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그중에 제일 압도적인 숫자는 고작 <마당있는 집에서 개 키우며 사는 것>이었다 축소라면 대폭이고 왜소라면 퍄격이지만 어딘가 소박하기가 자학적이기도하고 애처롭기까지 했다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에게 어디까지 닦아 세웨야할 지 혹 게으름과 성급한 체념을 꼬집어 우리의 분발을 독려할 여지는 정말 없는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 자문해 보았다

어째튼 돌이켜보면 세속적인 욕심을 안고 우리모두 출발선에 떠들석하게 섰던 적이 있다 그 때로보면 어차피 치루어야할 세상의 경쟁이었고 통과의례이었으니 지금와서는 물을 수 없는 책임이며 탓할 수 없는 무지일 수 있다 그런데 그 고유의 목적이 달성 아니 되었다면 그렇다면 궤도수정없이 불굴의 의지와 투지로 초지일관하여 나가야 할까 세상이 재단하고 기획한 성공의 잣대속에 끊임없이 이를갈며 설욕을 위해 남은 삶을 소진해야할까라는 물음은 전적으로 개인에게 달려있을 것이다

세상의 성공은 노력없이는 절대 불가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사람의 모든 노력이 세상의 성공으로 연결되지는 않는 것을 알게된 것만도 순전히 살아온 세월 덕분으로, 세상의 이치가 그렇게 짜여있지 않다 동시대에 사는 우리세대가 이른바 <마당있는 집에서 개키우며 사는 것>을 꿈으로 간직하게된 사연은 어딘지 빙고게임과 닮아있다 기상과 동시에 진력으로 하루를 살았으나 빙고를 외칠 수 없었던 절대다수의 범용한 사람들과 그들의 애환이 애틋하다


하루하루 일과를 챙겨 소화해나가고 칸칸히 번호를 마치다보면 어떨 때는 가로나 세로로 혹 대각선으로 빙고가 될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천만 다행이나 아니되었다고해서 내삶이 왜소했으며 내가 칸칸이 채운 하루가 미진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른바 Big Blast, 대박은 아니었을 지언정 쪽박 또한 아니어서 우리는 그때 그때마다 선택의 진지한 고민을 했고 최선이라 여기는 세월을 아낌없으며 눈물겹게 살지 않았던가 그러면 그것으로 족하고 넉넉하다 그 표현이 진부한 대로 그래서 삶을 그 과정의 미학이라고 일컫는 것 일거다


신산스런 이 보급투쟁에서 분명 어제보다 가난할 내일을 맞이함에 이른바 <내려놓는 미학>-- 쫄아든 꿈을 비웃기보다는 살다가 왜소해진 삶의 떳떳한 가난과 그 이치를 즐긴다는 것(安貧樂道)

그리고 나아가 어떤 단절의 기쁨까지도 예비해야할 때라면, 끊임없는 세속적인 추구와 비뚤어진 기아심리는 나이가 그만하면 충분히 추할 수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래 모든 것이 그렇듯 중요한 것은 시기이며 등장보다는 퇴장하는 그 뒷모습이 가능한 아름다우면 하는 바램이 있다

때를 알고 내려야 비로소 좋은 비다(好雨知時節)라는 두보의 시를 그저 늙은 곰이 말 재주만 늘었다며 왼고개를 틀 이유는 없을 것이다 천하의 이치를 어찌 두보만 알고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우리가 모르겠는가……그래! 지금일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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