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의 풍경

나이가 들어 이제 회상하기에도 민망하지만 어린 시절 방학을 맞을 때면 방학책 겉표지에 그려져 있던 한 폭의 수채화 그림이 늘 내 가슴속에 남아있다 몇 그루의 미류나무 위에 흰 뭉게구름이 걸려있고 하얗게 부서지는 웃음을 날리며 홍조띤 아이들이 잠자리 채 같은 걸 가지고 무엇인가 수집하려 좁은 농로길을 따라 걸어가는 그런 그림이었다 세월이 지나도 한결같이 무언인가에 쫓기는 심정일 때 그 그림을 생각하면 까닭없이 느긋하고 한가로움 같은 것을 느껴져 나는 그 그림을 회상하기 좋아한다

거기에다 하나 더 연상되는 기억으로는 역시 방학 때 찾아간 어느 시골의 모습, 녹음이 우거진 염천의 하늘 밑에서 조붓한 길을 따라 멀리서 사람은 보이지 않은 채 집채 만한 커다란 지게 풀섶만이 좌우로 기우뚱 거리며 언덕을 넘어 사라지던 모습, 사라지고 난 후의 그 묘한 아련함이라고나 할까 그 아득한 삶의 부하 같은 것이 어린 내게도 전해져 그 후로 내가 삶의 신산스런 구비를 돌 때면 반드시 떠오르게 마련인, 용케도 건들거리며 사라지던 풀섭 지게의 모습은 세월속에서도 내게는 한폭의애잔한 마음 속 풍경이 되었다

그 이후 살아가면서 먹이를 찾아 눈밭 위를 내닫는 짐승을 보거나 더러 성의 없는 밥상머리에서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찬물 마시듯 소주를 마시는 아버지의 뒷모습 이라든지 일찍 저물어 눈오는 겨울날 장사를 마치고 눈을 털며 들어오는 엄마의 신산스런 모습에서, 30여년전 이민을 와서 처음으로 겪게된 우체부 배달직 훈련 3일째 망아지 만한 개에 쫓겨 줄행랑을 놓던 내 작은 모습에서도 나는 그 풀섭 지게의 풍경을 떠올리며 제법 향수와 같은 용기를 얻곤 했다

굳이 삶의 무게라 말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겪고 있기에 쉬 알 수있는 놈들의 존재. 언젠가는 끊어질 생계이지만 살아있는 동안 생계에 관한 한 놈은 너무도 준엄해서 언필칭 신성 불가침의 영역이라 하지 않던가 누가 해도 천박하게 들리는 이른바 <먹고 산다>는 말, 그 행위의 집행만큼은 너무 고지식하여 지난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한 끼니 앞에 진실로 무력하였다 …

그리하여 젊든 늙든 성하든 병들었건 간에 한 생물체로서의 먹이활동은 계속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꾸준히 바깥 세상에서 가져와야하고 또 그렇게 하기위해서는 저 혼자 사는 천하가 아니므로 때로는 타협이 양보로 양보는 또 다시 굴복으로 변용되는 경우가 왕왕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일이란 신념이니 가치이니 다른 생물체에겐 쉽게 이해되진 않는 자존심등도 있기에 어느 해지는 저물녁에 불복의 술주정을 통해서라도 파들거리는 자존을 추슬려가며 어쩔 수 없었고 피할 수 없었던 적당한 굴신과 비겁을 아파하는 경우도 있었으리라

듣기 좋은 위로처럼 들리겠으나 호랑이도 함정에 걸려들어 빠지면 꼬리를 흔들어 밥을 구한다 들었다 또한 엉뚱한 전용(轉用)같지만, 그래서 냉정한 법 마저도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행한 살인조차도 정당방위라는 이름으로 그 예외를 인정하고 있는 것도 기억할 만하다

또한 한창 궁할 때 역사적 영웅들도 실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에도 막부를 세워 근세 일본을 통치한 도쿠가와(徳川)도 다키다(竹田)와의 한판 승부를 가르는 고비에서 그야말로 간과 뇌가 쏟아지는 그 치열한 한 판의 싸움에서 몰리게 되어 도망을 치는데 나중에 보니 얼마나 줄행랑을 볼품없게 쳐놨던지 말안장에 생똥을 싸붙였고 조조도 마초에 쫒길 때는 붉은 전포와 투구를 벗어던지고 얼른 수염을 잘라 졸장들의 틈에 끼여 위장함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한 때 일월(日月)도 구름에 가리듯 단언컨데 목숨이란 살아있어 조금이라도 소용에 닿는 한 그걸 아끼기 위한 어떤 볼성사나운 사람의 일도, 감히 손가락질 받아 비난 받을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살아남아 금박 먹인 명함 하나 못 갖추며 살았고 가정을 일구어 아이들을 성공가도로 싸몰아 넣지도 못 했다 게다가 삶의 윤리마저도 적당한 비겁과 소심으로 살아왔을 지 모르겠다 그러나 당시로보면 우린 그때 그때마다 나름 진지하고 대체로 성실했으며 최선이라 여긴 일을 하며 산것 역시 부인 할 수 없는 사실 이어서 그리 큰 부끄러움은 아닐 것이다 삶은 땅을 일구고 씨를 집어넣는 경작과 같아서 사람이 하는 역활이 있고 하늘이 하는 몫도 엄연히 있을 것이다

설사 내 바램이 맞아 떨어지지 않더라도 하늘을 우러러 원망함도 땅을 굽어 서운함도 이제 의미가 없다 우리가 겨누고 있는 것은 한 점 흠결없는 완벽한 삶(flawless life)이 아니라 엎어지고 넘어지되 얼마나 실하게 일어나 앞으로 나아 가느냐에 방점이 찍혀있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느닷없지만 우주의 섭리가 있으므로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하늘이 그렇게 시리도록 푸르고 강물은 하염없이 도도하며 도대체 바다와 산이 이토록 의연할 수 있단 말인가…..

글쓴이를 만나보시려면

의견 등록


사이트 기준에 맞지 않는 욕설 및 수준이하의 비판, 모욕적인 내용은 삭제됩니다.

Mn    

관련 커뮤니티

제목 등록 조회 일자
일제강점기 한국 문화·산림보존 헌신 - 아사카와 다쿠미 양국 추모 글로벌한인 1159 04/02/24
제철밥상 밥은보약 달래전&달래장 글로벌한인 1262 02/23/24
한국 의대선망' 조명 ..급여·안정성에 끌려 반도체마저 외면 글로벌한인 1085 02/19/24
재외동포 비즈니스 자문단(OK Biz) 모집 글로벌한인 920 02/16/24
제철밥상 밥은보약|EP.1 봄동겉절이 글로벌한인 745 02/09/24
토트넘 감독 "손흥민은 국가 영웅…끝까지 가길" 글로벌한인 1054 02/06/24
아마존 등 소매·물류 업체들 드론 배송 활성화 글로벌한인 1231 01/04/24
뇌졸중 전문가들이 꼽은 '꼭 지켜야할 예방수칙 3가지 글로벌한인 1275 12/03/23
코리안 언더독' 이야기 - BBC News 코리아 글로벌한인 8004 10/10/23
제78차 유엔총회 윤석열 대통령 기조연설 글로벌한인 6631 09/23/23
'해트트릭' 손흥민, BBC 베스트11 선정 글로벌한인 6676 09/05/23
양도 소득세를 면제 받으려면 글로벌한인 6886 07/16/23
윤석열 대통령, 재외동포청 출범식 기념사 글로벌한인 6805 06/11/23
윤석열 대통령, 제68회 현충일 추념사 (2023년 6월 6일) 글로벌한인 6680 06/09/23
더 글로리 실화판 - 전 12년간 학교폭력 피해자입니다 글로벌한인 6711 04/1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