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순 위안부 증언 30주년 '날조' 비방에 맞서 싸워…위안부 문제 해결책은 "사죄·기억·비석"
08/13/21 "'용기를 내서 그런 증언을 했겠구나'하는 생각에 마음이 떨렸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고 공개적으로 증언한 김학순(金學順·1924∼1997) 씨의 목소리를 처음 보도한 일본 저널리스트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는 녹음테이프로 김씨의 발언을 처음 들었던 30년 전의 느낌을 이렇게 회고했다.
김씨는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 운동에서 기폭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1991년 8월 14일 얼굴과 이름을 공개한 상태로 서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일제 강점기 전쟁터에서 일본군을 성적으로 상대하는 일을 강요당했다고 증언했다.
성적 피해를 공개하기 쉽지 않은 시절에 이뤄진 김씨의 회견은 다른 피해자가 용기를 내 증언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아사히(朝日)신문 기자였던 우에무라는 기자회견 사흘 전인 1991년 8월 11일 "감금돼 달아나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잊고 지내고 싶지만 잊히지 않는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화가 나서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는 김씨의 발언을 지면에 실었다.
김씨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찾아가 말한 내용을 녹음한 테이프를 듣고 기사를 쓴 것이다.
전쟁 중 동원됐던 '조선인 종군 위안부' 중 한 명이 서울에 생존해 있으며 "체험을 그저 숨겨오기만 했던 그녀들의 무거운 입이 전후 반세기 가까이 지나서 어렵게 열리기 시작했다"라고 의미를 부여하며 피해자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보도였다.
우에무라는 피해 당사자가 지원 단체의 조사에 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뉴스라고 생각했다면서 "'피해자가 간신히 그렇게 말하기 시작했구나'하는 느낌이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모르는 상태로 보도했고 피해자의 정체는 기자회견을 계기로 확인됐다.
30년 전 우에무라의 기사는 한국에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지원 단체에 정식으로 피해 사실을 진술한 것을 처음 알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김씨는 결과적으로 위안부 운동에서 상징적인 존재가 됐다.
물론 이보다 앞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이야기가 보도된 사례도 있다.
예를 들면 일본 오키나와(沖繩) 머물다 불법 체류자로 분류돼 추방 위기에 몰렸던 배봉기(1914∼1991) 씨가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을 밝혀서 1975년 복수의 현지 언론에 소개됐다.
김씨의 기자회견 30주년을 앞두고 11일 연합뉴스와의 전화 인터뷰에 응한 우에무라 '슈칸킨요비'(週刊金曜日) 사장 겸 발행인은 "총리 등 일본의 정치 지도자가 진심 어린 사죄를 피해자에게 제대로 전하지 않았다"라고 여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유를 꼽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책을 묻자 "김학순 씨가 30년 전에 어떻게 해결 가능한지 말해줬다"며 "나는 정말 그 말을 잊을 수 없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우에무라는 첫 기사를 쓰고 3개월여가 지난 1991년 11월 25일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김씨가 "돈을 얼마를 받아도 버려진 이 몸을 되돌릴 수 없다. 일본 정부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 젊은 사람이 이 문제를 알도록 하면 좋겠다.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비석을 세워주면 좋겠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