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사학자가 쓴 '서울, 권력 도시'

1925년 10월 15일 서울 남산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이 들어섰다. 신궁은 일본의 고유한 종교 공간인 신사(神社) 중에서도 격이 높은 시설이다.

한반도를 집어삼킨 일제가 조선신궁을 지은 이유는 명확했다. 조선 정치와 경제뿐만 아니라 정신과 사상도 지배하겠다는 의도가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훗날 일본과 조선이 하나라는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구호로 나아갔다.

그런데 이 같은 시도는 과연 성공했을까. 일본 학자 오가사와라 쇼조(小笠原省三, 1892∼1970)는 조선신궁 준공 무렵 경험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신궁의 배전(拜殿) 앞에 가면 일본인들은 모자를 벗고 머리를 조아리지만, 조선인들은 획 돌아서서 집으로 돌아가 버린다. 나는 한 시간 넘게 배전 앞에 서 있었다. 하지만 조선인은 그 누구도 배례(拜禮)하는 이가 없었다."


역사학자 토드 A. 헨리 미국 캘리포니아대 샌디에이고캠퍼스 교수는 신간 '서울, 권력 도시'에서 오가사와라 기록을 인용한 뒤 일제가 동화를 목표로 경성에서 추진한 도시 계획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고 주장한다.

일제가 경성의 근대화를 이뤄낸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시가지 도로를 격자형으로 바꾸고, 로터리를 설치했다. 위생이나 교통 등 도시 환경이 개선되기도 했다.

또 신궁과 신사를 숭배 현장으로 만들고, 경복궁에서 박람회를 열어 물질적 진보를 홍보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왕도(王都)를 일본의 근대 도시로 전환하고자 했다.

그러나 저자는 "재정적 제약과 계속되는 저항으로 경성은 고도로 불균등한 방식의 발전을 지속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엄밀히 따져보면 근대화한 도시 풍경이 주요 도로 주변에만 존재했다고 지적한다.

도시 공간에 주목한 그는 1919년 3·1운동을 일제강점기 주요 사건으로 인식하는 학계 주요 견해를 인정하면서도 지리적 측면에서는 도시 개혁이 사실상 이뤄지고 조선신궁이 세워진 1925년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아울러 일제가 신사 참배를 강요한 1937년도 중요한 변곡점이라고 평가한다.

저자는 "일제는 조선인을 재교육해 문중과 민족에 쏠린 편협한 충성심을 다민족적 정치체에 속하는 일체감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며 엘리트가 아닌 일반인들의 일상적 실천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이러한 일제 정책은 단편적이고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았다고 꼬집는다.

이어 "허식적 간선망과 형편없는 골목길 사이에는 상당한 불일치가 있었다"며 "일본이 전시 체제에 들어선 뒤에는 더 철저한 황민화(皇民化) 프로그램이 필요했지만, 파열을 고스란히 물려받아야 했다"고 강조한다.

즉 일제는 경성에 물질과 정신을 동시에 이식하려 했지만, 조선인은 일본인처럼 행동하는 척하면서도 완전히 동화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저자는 현재 서울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도 꽤나 부정적이다. 그는 총독부 건물을 허물고 진행 중인 경복궁 복원을 예로 들면서 청산되지 않은 과거사에 대해 입을 닫게 만드는 한편, 반일적 주체가 되도록 강요하는 서울의 탈식민 프로젝트는 일제 통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비판한다.

산처럼. 김백영·정준영·이향아·이연경 옮김. 484쪽. 2만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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