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범죄 참회' 촉구한 '일본의 양심' 소다 가이치

"소다 선생은 일본 사람으로 한국인에게 일생을 바쳤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나타냄이라. 1867년 10월 20일 일본국 야마구치(山口)현에서 출생했다. 1913년 서울에서 가마쿠라(鎌倉)보육원을 창설하매, 따뜻한 품에 자라난 고아가 수천이리라. 1919년 독립운동 시에는 구속된 청년의 구호에 진력하고, 그 후 80세까지 전국을 다니며 복음을 전파했다. 종전 후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에 국민적 참회를 할 것을 순회 역설했다. 95세 5월. 다시 한국에 돌아와 가마쿠라보육원 자리에 있는 영락보린원에서 1962년 3월 28일 장서(長逝)하니 향년 96세라. 동년 4월 2일 한국 사회단체 연합으로 비를 세우노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에는 외국인 선교사 묘원이 있다. 이곳에 안장된 유해는 모두 417명이다. 묘비의 주인공은 대부분 서양인이지만 유일하게 일본인 이름이 눈에 띈다. 비석 전면에는 십자가와 함께 '孤兒(고아)의 慈父(자부) 曾田嘉伊智先生之墓(소다 가이치 선생 지묘)'라고 새겨져 있다. '고아들의 자비로운 아버지'가 부인 우에노 다키코(上野瀧子)와 함께 잠든 곳이다.

소다는 젊은 시절 초등학교 교사와 탄광 광부, 노르웨이 상선 선원, 독일 회사 직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중국 본토와 홍콩, 대만 등지에서도 일하며 쑨원(孫文)의 중국 혁명에도 참여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았으나 타고난 방랑벽 탓에 정착하지 못했다.

1899년 어느 날 대만에서 술에 취해 길을 가다 넘어져 거의 죽어가고 있을 때, 그를 불쌍히 여긴 한 한국인이 여관으로 업고 데려가 치료해주고 밥값까지 내줬다. 소다는 남의 도움으로 얻게 된 인생을 보람 있게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름도 성도 모르지만 은인의 나라에서 봉사하겠다는 생각으로 1905년 6월 한국에 건너왔다. 소다는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YMCA 전신)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다가 YMCA 종교부 총무를 맡고 있던 월남 이상재를 만난 뒤 그의 인품에 감화돼 개신교에 귀의했다. 4년 뒤에는 숙명여고와 이화여고 영어 교사 우에노를 만나 결혼했다. 그때부터 소다는 서울 중구 회현동의 경성감리교회 전도사가 돼 복음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썼다.

1911년 9월 일제는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조선 총독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민족지도자들을 대거 검거하는 이른바 105인 사건을 일으켰다. 윤치호·이상재 등 YMCA 인사도 끌려가 고초를 겪자 소다는 데라우치 총독에게 "무고한 사람을 당장 석방하라"고 촉구했다.

지금의 덕수교회인 경성기독교회 장로 와타나베 도루(渡邊暢) 대법원장에게도 찾아가 "죄 없는 사람에게 왜 벌을 주려 하느냐"고 따졌다. 1919년 3·1운동 때도 구속자 석방 운동을 벌이는가 하면 법정에서 이상재 재판을 맡은 판사를 꾸짖기도 했다. 이로 인해 소다는 동족에게 배신자 소리를 들었다.

그를 보육의 길로 이끈 사람은 일본 아동복지사업의 선구자로 불리는 사다케 오토지로(佐竹音次郞)였다. 사다케는 1896년 가마쿠라에 보육원을 만든 뒤 1913년 중국 뤼순(旅順)에 이어 1921년 서울에도 지부를 냈다. 우리나라 근대식 보육원의 효시였다.

사다케는 "지금 조선에 건너오는 일본인들은 일확천금을 꿈꾸는 인간뿐인데, 그중에 한 사람이라도 순수한 박애주의 정신으로 한국을 생각하고 헌신하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란 말을 듣고 지부 설립을 결심한 뒤 소다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소다 부부는 용산구 후암동의 가마쿠라보육원에서 정성을 다해 아이들을 돌봤다. 그때는 버려진 아이가 거리에 넘쳐났는데, 세계 대공황까지 겹쳐 하루하루 버티기도 힘겨웠다. 소다는 가마쿠라보육원 출신이 나중에 독립운동가가 됐다는 이유로 일제 헌병에게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43년 소다는 76세의 나이로 함경남도 원산의 일본인교회에 초빙됐다. 서울 일신초등학교 교사이던 부인에게 보육원을 맡기고 혼자 부임했다가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소련군이 진주하자 원산의 일본인들은 신변에 위협을 느껴 일본인교회로 대피했다. 소다의 인품이 지역 주민에게도 알려져 누구도 이들을 해코지하지 않았다. 소다는 1947년 10월 원산의 일본인들을 인솔해 서울로 내려온 뒤 귀국을 주선했다. 자신도 전쟁에서 진 일본인의 마음을 위로하고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부인은 고아들을 돌보느라 한국에 남았다.

그는 신일본(新日本)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계 평화'라고 적힌 어깨띠를 두르고 한 손에는 성경책을 든 채 전국을 다니며 "전쟁을 일으킨 일본인이 회개해야 한다"고 외쳤다. 또 가는 곳마다 일본인이 인류에 범한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다.

소다가 귀국한 뒤 가마쿠라보육원은 북한 신의주에 보린원을 세운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가 이어받아 지금의 영락보린원이 됐다. 부인은 1950년 1월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양화진에 먼저 묻혔다. 한일 간 국교가 없던 상태여서 소다는 아내의 장례를 지켜보지 못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일본의 한 기자가 1960년 아사히(朝日)신문에 소다의 방한 허용을 촉구하는 칼럼을 싣고, 한경직 목사가 적극 나서 1961년 5월 특별기편으로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소다는 영락보린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여생을 보내다가 이듬해 3월 28일 눈을 감았다.

장례식은 4월 2일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사회단체연합장으로 치러졌다. 한경직 목사가 장례 예배를 인도하고 정희섭 보건사회부 장관, 윤태일 서울시장 등이 조사에 나섰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일본 고사카 젠타로(小坂善太郞) 외무상은 조화를 보냈으며 유족 대표로 조카 마스다 스미코(增田須美子)가 참석했다. 한국 정부는 일본인 최초로 문화훈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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