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를 울린 '고아들의 어머니' 윤학자

1968년 11월 2일 전남 목포에서 최초의 시민장이 치러졌다. 주인공은 이틀 전 세상을 떠난 다우치 지즈코(田內千鶴子), 한국 이름은 윤학자(尹鶴子)였다. 언론들은 "목포를 울린 장례, 3만 조객의 슬픔을 뒤로하며 '고아의 어머니' 윤학자 여사 떠나시다"라고 보도하며 고인을 추모했다.

당시 인구가 16만여 명이던 목포에서 3만 명이나 되는 조문객이 몰렸다면 목포시 전체가 슬픔에 빠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포 시민들은 무엇 때문에 한국인도 아닌 일본인 여성의 죽음을 그토록 아쉬워했을까.

영결식에서 고아 출신의 한 추모객이 낭송한 애도시에서 해답을 짐작할 수 있다. "눈물과 피와 땀으로 씨를 뿌린 사람이 있다면 어머니, 그건 당신입니다. 언어도 풍습도 다른 이 나라에서 배고픔에 굶주려 우는 아이들을 모아 당신의 손으로 밥을 지어 먹이셨습니다."

다우치는 1912년 10월 31일 일본 시코쿠(四國)섬 남부 고치(高知)현에서 태어났다. 생일이 기일과 같은 날짜여서 며칠 뒤면 탄생 108주년과 별세 52주년을 맞는다. 1919년 조선총독부 목포시청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현해탄을 건넌 뒤 목포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1932년부터 미국 남장로회가 세운 목포 정명여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근무했다.

1936년 고등학교 은사 소개로 보육시설 공생원(共生園)에서 봉사를 시작했다. 공생원은 목포의 '거지 대장'으로 불리던 윤치호가 1928년 유달산 자락에 세운 보육시설이다. 그는 전남 함평 출신으로 서울의 피어선성경학교(현 평택대)를 졸업하고 목포 양동교회 전도사로 일하다가 고아들을 거두어 길렀다.

둘은 사랑에 빠져 서로를 간절히 원했지만 장벽은 높았다. 윤치호 어머니는 "양반 집에서 일본인 며느리를 들일 수 없다"면서 식음을 전폐하며 반대했고, 다우치는 친척과 친구들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독실한 크리스천이던 다우치 어머니는 "하늘나라에는 일본인 조선인 구별도 없다. 네가 사랑한다면 결혼을 말리지 않겠다"며 격려했다. 둘의 아버지는 모두 세상을 떠난 뒤였다.

공생원 창립 10주년 기념일인 1938년 10월 15일, 지금의 목포상공회의소가 있는 목포 공회당에서 일본인교회 후루가와(古川) 목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목포 거지 대장이 총독부 일본인 관리의 딸과 부부가 된 것은 전국의 화제가 됐다. 다우치는 남편 성을 따르고 이름의 두 글자를 따서 윤학자로 개명했다.

8·15 광복은 한국인 모두의 기쁨이었지만, 윤치호·윤학자 부부에겐 시련의 시작이었다. 남편은 친일파, 부인은 원수 나라의 여자로 낙인찍힌 것이다. 윤학자는 어머니와 함께 쫓기다시피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공생원 원생과 목포 시민들이 나서 윤치호를 변호했다. 이에 용기를 얻어 윤학자도 공생원으로 돌아왔다.

1950년 6·25가 터져 또 시련이 닥쳤다. 북한군이 목포에 진입하자 부부는 "고아들을 버려두고 우리만 도망칠 수 없다"며 공생원을 지켰다. 북한군은 윤치호를 붙잡아 "친일파에다 미국 선교사의 앞잡이 노릇을 했고, 이승만 정권 아래서도 목포 구장(區長)을 지낸 반동분자"라며 인민재판에 회부했다.

이때도 공생원 원생과 시민들이 "이분을 처형하려면 우리를 먼저 죽여라"라고 버티며 구해줬다. 인민군이 물러간 뒤엔 공산군 부역자로 지목돼 구속됐으나 이때도 공생원 원생과 주변 인사들의 구명운동 덕분에 풀려났다.

그러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윤치호는 전쟁통에 공생원 원생들이 굶어 죽을 위기에 놓이자 1951년 어느 날 먹을 것을 구하러 광주에 갔다가 행방불명됐다. 전남도청 담당자를 만나 긴급구호를 요청한 뒤 여관에 묵었다가 건장한 청년들에게 끌려갔다는 게 마지막 목격담이었다. 빨치산에게 희생됐을 것이란 소문이 무성했다.

그때부터 공생원 식구 300여 명을 돌보는 것은 고스란히 윤학자의 몫이었다. 어머니가 홀로 사는 일본으로 돌아가라는 권유도 많았지만 "아이들을 버려둘 수 없고, 남편도 기다려야 한다"며 거부했다. 손수 리어카를 끌고 먹을 것을 구하러 다니는가 하면 결혼 때 일본에서 가져온 오르간과 기모노 등을 팔아가며 힘겹게 공생원을 지켰다.

친자식 4남매도 원생들과 똑같이 먹이고 입히며 길렀다. 맏아들 윤기 씨가 쓴 책 '어머니는 바보야'를 보면 "난 고아도 아닌데 왜 이런 대접을 받고, 일본인 자식이란 놀림까지 당하며 살아야 하나"란 생각으로 원망도 많이 했다고 한다.

정부는 윤학자에게 1963년 문화훈장을 수여했다. 소다 가이치(曾田嘉伊智) 전도사에 이어 일본인으로선 두 번째였다. 일본 정부도 1967년 훈장을 줬다. 목포시가 1963년 시민의 상을 제정하며 시민들을 대상으로 수상자감을 묻는 설문조사를 했을 때 압도적으로 그가 첫손에 꼽혔다. 목포시는 1회 조희관, 2회 박화성에 이어 3회 때 허건과 함께 윤학자에게 시상했다. 1968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 함평의 남편 곁에 묻혔다.

그때까지 3천 명의 고아를 기른 공생원은 윤기 씨를 비롯한 자녀와 사위 등이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다. 목포와 서울에 어린이집, 장애인요양원, 재활원, 자립원, 기술교육원 등도 개설했다. 일본에선 도쿄(東京)·오사카(大阪)·교토(京都)·고베(神戶) 등지에 재일동포 독거노인 쉼터 '고향의 집'을 꾸려가고 있다.

윤학자는 눈을 감기 전 병상에서 "우메보시(일본식 매실장아찌)를 먹고 싶다"고 되뇌었다. 훗날 윤학자 생애를 담은 TV 다큐멘터리를 보고 감동한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는 그 대목을 기억하고 2000년 3월 매화의 고장으로 이름난 자신의 고향 군마(群馬)현의 매화나무 20그루를 공생원에 기증했다. 그러나 뇌경색으로 쓰러져 숨지는 바람에 그 나무가 꽃을 피운 장면을 보지 못했다. 윤학자와 이름이 똑같은 부인 오부치 지즈코(小淵千鶴子) 여사가 2008년 10월 남편 대신 공생원을 방문해 잘 자라는 모습을 확인했다.

일제강점기 35년은 우리 민족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을 주었고, 그 상흔은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다. 그러나 당시에도 윤학자처럼 한국인을 진정으로 사랑한 일본인이 있었고, 지금도 그를 닮은 일본인이 있을 것이다. 요즘처럼 한일 두 나라 국민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따가워질수록 윤학자 여사가 더욱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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