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서부 10대 캐년 트레킹. 10 - 그랜드 캐년

리버 트레일 3km를 묵묵히 걸어 사우스 카이밥 트레일을 올라가다 일기 예보와는 다르게 정오가 지났는데도 하늘 한 점 가리지 않은 구름 덕택에 고스란히 정수리에 꽂히는 뜨거운 햇살. 잠시 숨을 고르며 뒤를 돌아봅니다. 콜로라도 강변 유일한 숙소인 팬텀 랜치(Phantom Ranch)가 신기루 속의 오아시스처럼 흐늘거립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사냥을 위해 머물렀다 해서 루즈벨트 렌치라고도 불려 지는데 음식이나 음료를 구매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 숙소를 운영하기 위한 물품을 조달하기 위해 왕래하는 노새들의 무거운 발걸음이 지나가는데 애처롭도록 지쳐 보입니다. 시선을 떼지 않고 따라가자니 구름다리를 건너갑니다. 인디언의 땅, 바람의 땅에 준설된 저 구름다리. 1920년 경 인디언들의 손에 의해 철제로 제작된 삶의 다리. 그러나 자연보호를 위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자연의 일부로 살아왔던 인디언들이 수천 년 삶의 터전으로 삼아온 보금자리를 내어주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음을 상기하면서 괜스레 씁쓸한 동병상련의 애처로움이 동정처럼 일어납니다. 유장한 물은 그 파란만장한 역사의 현장을 목격하고도 아무런 말도 없이 흘러만 가고 피의 역사를 보아온 산증인인 바람도 모든 것을 용서라도 하려는 듯 오늘 평화스런 협곡을 부드럽게 보듬어 주고 지나갑니다. KAIBAB 트레일. 그랜드 캐년의 심장부를 가로 지르는 카이밥은 우스갯소리로 우리 한인들은 개밥이라고 쉽게 부르는데 이것은 인디언의 말로 ‘거꾸로 선 산’이라는 뜻이랍니다. 거대한 대 협곡이 마치 산을 뒤집어 놓은 듯한 모습이라 부르게 된 인디언들의 소박한 표현력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원시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신비의 땅. 그리고 거대한 인디언의 땅. 발길이 닿는 곳마다 거룩하고 신성한 거꾸로 서있는 산에 우리의 족적을 남기며 어쩌면 우리들의 조상일 것 같은 그 인디언들이 걷던 이 길을 오늘은 우리가 문명을 앞세워 걷고 있습니다.

강변은 항상 림보다 기온이 10여도 높아 오늘은 무척 무덥습니다. 6월부터는 40도가 넘는 사막기후로 변해 의지 약한 트레커들을 시험에 들게도 합니다. 여름이 일찍 온 이곳에 봄꽃은 어느새 다 져버리고 밤이슬을 먹고 자라는 사막성 선인장들이 제철을 만나 요염한 꽃을 피워냅니다. 저 위 전망대에서 내려다 볼 때는 아무런 생명체조차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아 보이던 이 계곡에 풀이며 꽃이며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고 수억 년 동안 강물이 깎아 만든 주변 절벽들이 황홀경을 선사합니다. 거대 바위에 새겨진 세월의 흔적을 들추는 작업. 내려온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가장 문명의 나라 미국 내에 존재하는 가장 원시적인 그랜드 캐년. 대자연의 신비와 웅장함이 살아 숨 쉬는 듯 수 억 만년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독특한 지층을 이루고 있어 지금도 계속되는 침식 작용에 그랜드 캐년은 매번 다른 모습으로 변화합니다. 12개의 바위 층을 가진 그랜드 캐년은 협곡마다 변화무쌍한 지구의 형성 과정이 차곡차곡 세월과 함께 쌓여 지질학의 교과서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방문객 90퍼센트 이상이 전망대에서 그냥 휘 둘러보고 갑니다만 우리들처럼 이렇게 그 신성한 인디언의 길을 따라 온 자만이 이 신의 걸작품을 감상하고 품평할 기쁨을 누립니다.

그런데 작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더위에 지친 일행 하나가 헬기 요청을 합니다. 이 참에 지참한 물량을 점검하니 두사람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수원지라고는 하나 없는 이 길을 오르기 위해서는 그리고 치명적인 여름 더위 속에서는 물이 곧 생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 같은 혹독한 더위와 갈증에는 자칫 사고로 이어질 소지가 다분하니 돌아가는 길 더 길고 멀어도 그늘이 있고 물이 풍부한 브라이트 엔젤로 가는 것이 현명하리라 판단을 하고 최종 결정을 내립니다. 남성 한분을 붙여서 되돌아가게 합니다. 생명을 걸고 만약에 라는 가정을 할 필요도 없을뿐더러 위험에 처할 것이 자명한데 아집과 허세를 부릴 상황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세명을 보내면서 모두들 안전을 기원하며 그들이 시야에서 벗어날 때 까지 바라보다 나머지 일행 10명은 그대로 사우스 카이밥 트레일을 치고 오릅니다. 숨이 턱턱 막히고 턱밑에 까지 차오르는데 그늘 하나 없는 길에 해는 중천에 바로 떠서 우리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그저 그늘을 쫓아가는 길. 이제 시장기가 느껴집니다. 그나마 그늘이라고 만들어진 바위밑에서 모두 점심을 먹습니다. 즉석에서 싸먹는 Wrap 샌드위치. 평소에는 밥과 찬으로 도시락을 싸지만 오늘은 날씨를 고려하여 준비한 양상추며 토마토며 양파의 싱그러움이 이 더운날에 제격입니다. 식후 몰려드는 삭곤증. 그리고 가장 더운 오후 2시. 그렇습니다. 이런 광폭한 일기 속에서는 차라리 해가 식고 산그늘이 들 때 까지 부족한 수면을 채우고 쉬어감이 현명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인색한 바위 그늘 밑에서 꿀잠을 잡니다. 한 시간도 채못잤을까 정신을 차리고 다시 등정길에 오릅니다.

인생도 호사다마라 했습니다. 좋은 면이 있다면 그 이면에 나쁜 것도 있는 법.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른 날이라 캐년의 풍광을 마음껏 볼 수 있어 좋았지만 강렬한 햇볕을 막아줄 그늘막이 없어 여간 고통스럽지 않아 땀은 비 오듯이 쏟아지고 한증막처럼 더워진 육신에서 한 대야 빠져 나오는 신진대사의 찌꺼기들. 모든 미련을 버리고 한 점 목표를 정하고 나니 차라리 개운하고 홀가분해집니다. 인생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차라리 즐기라 했던가! 누가 이 장대한 자연 앞에서 산 앞에서 자신 있다 허풍을 떨 것인가? 산은 늘 우리에게 자세를 낮추고 겸허하게 임하라 가르칩니다. 거대한 산은 삼킬 듯이 버티어 있고 그 앞에서 힘겹게 오르는 우리는 너무도 초라하고 작아 보입니다. 그러나 좌절할 수 없는 것은 내 자신이 스스로 택한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넘어야 하는 이 순간 이 가혹한 형벌 같은 도전을 견디게 하는 것은 함께 하는 동행들의 다독이는 격려. 산에서 우리는 늘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거의 다 왔다고. 오아시스가 바로 저기이고 정상이 멀지 않다고..

다시 길을 오릅니다. 햇볕은 이미 한풀 꺾여 서녘으로 기울고 산그늘이 부분적으로 덮어갈 즈음 캐년의 마지막 정상이 저만치에 나타납니다. 한발 한발이 난행 그 자체의 비탈길입니다. 마음은 벌써 정상을 올랐는데 몸은 항상 마음보다 뒤쳐져서 갑니다. 일행들에게 남은 음료를 건네주고 독려를 하면서 마지막 구간을 오기로 오릅니다. 체력은 이미 바닥이고 그저 혼신을 다해서 정신력으로 오릅니다. 마침내 정상에 발을 딛고 비록 무척이나 힘들었지만 해냈다는 자부심이 기쁨으로 승화되는 순간입니다. 다들 손을 맞잡고 어께를 감싸고 서로 격려의 말들을 아끼지 않고 나눕니다. 바람 한결 시원스레 불어주고 지나가며 참으로 수고했다며 치하하는 듯 토닥거려줍니다. 특히 구겨진 휴지처럼 혹은 시체처럼 쓰러져 버린 이들에게 말입니다. 붉은 빛이 감도는 초저녁. 구름을 벗어난 태양이 아늑한 푸르름으로 다시 비끼며 그 장엄한 그랜드 캐년을 비추고 또 다른 시간 속으로의 여행을 위해 영면을 취하려 합니다. 길게 내뿜는 날숨 속에 오늘 우리의 여정도 푸근하게 잠들려 합니다.

보다 자세한 정보는 미주트래킹을 참조하세요

미 서부 10대 캐년 트레킹. 10 - 그랜드 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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