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투사 계봉우·황운정 지사 고국에서 영면에 들다
04/26/19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던 계봉우(1880.8∼1959.7) 선생 부부 유해와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했던 황운정(1899.9∼1989.12) 선생 부부 유해가 22일 봉환돼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에 안장됐다.
계봉우 지사는 함경남도 영흥 출신으로 1919년 중국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북간도 대표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고, 독립신문에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글을 싣기도 했다. 1937년에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당한 뒤에도 민족교육에 전념해 '조선문법', '조선역사' 등을 집필, 정부로부터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이날 오전 서울공항을 통해 봉환된 계 선생 유해는 서울 현충원으로 봉송돼 오전 11시 유가족, 광복회, 일반 시민 등 5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안장됐다.
계봉우: 계봉우(桂奉瑀, 호는 북우(北愚), 뒤바보. 게봉우라고 쓰기도 한다. 1880년 8월 1일 ∼ 1956년 7월 5일)는 한글학자이자 역사가이다. 함경남도 영흥군에서 태어났다. 1911년, 북간도로 망명했고 거기에서 교직원으로 근무하다가 교육내용이 반일적이라는 이유로 서울로 압송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선생은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북간도 대표의원으로 부임해 1년간 의정 활동을 했으며 이듬해 중.한 노공동맹연합회 국민회 대표로 참가했다.
임시정부 간도 특파원으로 임명되어 간도지방 독립운동단체의 통일 노력과 함께 근대 한민족의 국외 이주와 민족운동에도 지대한 관심을 두고 1920년을 전후로 '북간도 그 과거와 현재', '아령실기(俄領實記)' 등을 발표했다.
3·1 운동 뒤에는 다시 북간도로 갔다. 1920년에 한인사회당에 가입했다. 자유시 참변 때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1922년 치타로 옮겨가서 《새바람》을 작성했다.
황운정: 1919년 3월 함북 종성(鐘城) 및 온성(穩城) 일대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1920년 중국 길림성 왕청현(汪淸縣)으로 망명했다.
러시아 지역으로 이주하여 1920∼1922년까지 연해주 추풍(秋豊) 솔밭관 한족공산당(韓族共産黨) 행정부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6월 연해주 추풍에서 조직된 솔밭관 한족공산당은 러시아 내전 와중에서 연해주 주둔 일본군과 러시아 백위군에 맞서 싸웠으며, 러시아공산당과 적군을 지지하였다.
한족공산당은 주간신문『군성(群聲)』과 잡지『한살림』을 발행하여 항일선전과 맑스주의 보급에 노력하였다.
또한 ‘우리동무군’이라는 비정규 무장부대를 창설하여 일본군·러시아 백위군·중국인 마적부대들과 맞서 투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