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떨고 있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의 망령

수를 나타내는 단어 가운데 해(垓)는 '경(京)의 1만배'를 의미한다. 1해는 1 다음에 동그라미가 20개 붙는데 이보다는 10의 20제곱이라고 하는 것이 더 편할 때도 있다.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은 들어본 적도 없을 법한 숫자다. 그러나 놀랍게도 지폐 한 장의 액수로 이 숫자가 쓰인 적이 있다.

1차대전의 패전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해체로 탄생한 헝가리는 높은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다 1927년 기존 화폐를 1만2천500대 1로 대체하는 새 화폐 '펭괴'(pengoe)를 도입했다. 그러나 부족한 세수를 돈을 찍어 메우는 그릇된 행태가 개선되지 않아 이 같은 화폐단위 변경(Redenomination)만으로는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위태롭던 펭괴는 1945년 7월부터 1년 동안 유통되는 통화의 총량이 2천조배나 늘어나면서 사실상 화폐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가치가 붕괴했다. 너무 빨리 물건값이 뛰기 때문에 사람들은 저금은커녕 단 1초라도 돈을 가지고 있기보다는 가치가 더 떨어지기 전에 어서 써 버리려고 애를 썼다. 이것이 단순한 인플레이션은 물론 '초'인플레이션이라는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극초'인플레이션, 즉 하이퍼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이다.

1946년 헝가리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이 극에 달했을 때 물가는 하루 15만%씩 치솟았다. 많은 경제학자가 이를 사상 최고 속도의 인플레이션으로 본다. 1해 펭괴지폐가 나온 것이 이 무렵이다. 이 화폐의 액면은 글자로 표기돼 동그라미 스무 개가 맞는지 확인하느라 고생할 필요는 없었다.

펭괴는 1946년 8월 40양(穰) 대 1이라는 초현실적인 비율로 대체하는 새 화폐 포린트가 나오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양'은 '해'의 1억 배로 1양은 1 다음에 동그라미가 28개 붙는다. 당시 유통 중이던 모든 펭괴 화폐의 가치를 다 합해도 미국 돈 1센트의 1천분의 1에 불과했다고 하면 이 돈이 얼마나 쓸모없게 됐는지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수치상으로는 이보다는 덜 극단적이지만 더 유명한 하이퍼인플레이션은 독일제국의 1차대전 패전 후 탄생한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일어났다. 승전국이었던 프랑스와 벨기에는 1922년말 바이마르공화국 정부가 전쟁배상금을 지불하지 못하자 공업지역인 루르에 군대를 보내 모든 산업시설을 점령했다. 이곳 근로자들에게 '소극적 저항'을 지시한 정부는 일하지 않는 근로자에게 월급을 지불하기 위해 돈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급격한 인플레이션은 정치, 경제적 혼란과 상승 작용하며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파괴력을 더해갔다. 1923년 초 250마르크였던 빵 한 덩어리 값이 그해 말이 되자 2천억마르크로 치솟았다. 아침에 급여로 받은 돈이 점심시간이 되면 쓸모없어져서 회사는 종종 하루에 두 차례 일당을 지급해야 했다.

수레에 지폐를 가득 싣고 가야 겨우 감자 몇 알을 살 수 있었다거나 지폐를 메모지나 아이들 장난감으로 썼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1919년 1월 미국 달러당 8.9마르크였던 환율이 1923년 1월 초 달러당 1만8천마르크까지 급등했고 일단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자 환율을 조 단위로 계산해야 할 정도가 됐다.

비교적 근래에는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악명 높은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소수 백인이 정권을 잡고 인종차별 정책을 펴던 옛 로디지아를 해체하고 새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시행한 토지 재분배 등 핵심 정책의 실패는 경제를 나락으로 몰고 갔다. 1980년 독립 당시 미국 달러보다 약간 높았던 짐바브웨 달러의 가치는 연간 물가상승률이 600%를 넘어선 2003년부터 수직낙하하기 시작해 2006년에는 기존 화폐와 1천 대 1로 교환되는 새 화폐를 내놓아야 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이 더욱 속도를 내자 정부는 2008년 7월에 물가 상승률이 2억3천만%라고 발표한 이후 더는 물가 통계를 내지 않기에 이르렀다. 모두 네 차례 화폐단위 변경을 단행했지만 통화량이 줄어들지 않은 상태에서 지폐에 찍힌 0을 아무리 줄여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말 그대로 천문학적인 짐바브웨의 인플레이션은 정부가 자국 통화를 포기하고 미국 달러, 남아공 랜드 등 외국 통화의 사용을 전면적으로 허용하면서 마침내 고삐가 잡혔다. 2009년 1월 발행된 100조 짐바브웨 달러 지폐를 비롯해 어마어마한 숫자가 찍힌 이 나라의 돈은 화폐로서 기능이 상실된 이후 오히려 가치가 오르고 있다. 수집가들뿐만 아니라 때로는 호기심으로, 때로는 '행운의 부적'으로 여겨 사들이는 일반인도 많아 이들 화폐는 인터넷에서 꽤 쏠쏠하게 팔려나간다.

이 밖에도 하이퍼인플레이션의 사례는 적지 않다. 바이마르공화국 때의 독일과 정치, 경제적 상황이 비슷했던 1920년대의 오스트리아나 1945~1946년 국공내전 시기의 중화민국, 역시 내전을 겪은 1990년대 초의 옛 유고슬라비아뿐만 아니라 경제위기가 되풀이되는 일부 중남미 국가가 적어도 월 수백, 수천%에 이르는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장기간의 저금리에다 원자재 가격 급등, 우크라이나 전쟁 등의 여파로 주요 선진국이 연간 기준 10%에 훨씬 못 미치는 물가 상승률을 기록했다고 해서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거론하는 보도가 계속 나온다. 물건을 사러 가는 동안에 가격이 올라 못 사고 돌아왔다거나 교사들이 바로 전날 받은 월급으론 버스비를 낼 수 없어 출근을 못 하는 바람에 학교가 문을 열 수 없었다는 '진짜' 하이퍼인플레이션과 지금 상황을 비교하는 것은 지나친 과장으로 보인다. 다만 신뢰를 잃은 화폐는 언제든 그야말로 휴짓조각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교훈만은 시대를 초월해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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