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 기본도, 근본도 없는 '볼턴 회고록' 유감이다

존 볼턴 전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 '그 일이 일어난 방' 파문이 한국 내에서도 일파만파다. 폭발력 강한 남·북·미 정상외교와 한반도 비핵화 협상 후일담을 쏟아낸 데다 사실과 주장을 범벅한 스토리를 휘갈긴 탓이다. 논란이 확산하자, 보다 못한 청와대 윤도한 국민소통수석이 브리핑을 열고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한미 정상 간 협의를 자신의 편견을 바탕으로 왜곡한 것은 부적절하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출간 전부터 비상한 관심을 끄는 회고록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 의미 있는 대응이었다고 하겠다. 볼턴 재임 시 카운터파트였던 정의용 국가안보실장도 사실을 크게 왜곡하고 외교의 기본원칙도 위반했다고 가세했다. 무엇보다 그는 이런 부적절한 행위가 한미 동맹과 양국의 안보이익 강화 노력을 저해할 수 있다는 입장을 미 국가안보회의(NSC)에 전했으며 미 정부가 적절한 조처를 할 것을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회고록 출간 금지 요청이 이미 현지 법원에서 기각됐지만, 외교기밀 누설에 따른 회고록 수익 환수와 형사처벌 개연성은 여전한 만큼 향후 추이를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문제가 된 볼턴의 회고록 출간 행위는 여러모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자기 책 장사를 위해 외교기밀을 아무렇지도 않게 소재로 이용한 것이 우선 기가 막힌다. 한때나마 지구촌 최강국 대통령의 최고위 외교안보 참모를 지낸 이가 이래도 되나 싶다. 할 짓이 아니다. 어느 국가가, 또 어떤 외교관과 참모가 미국과 신뢰를 가지고 외교를 할 수 있을까 싶다. 각국의 외교문서가 중요도에 따라 기밀로 분류되고, 일정한 봉인 기간이 부여되는 이유는 협상 진행 과정의 신뢰 형성임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결국 버림받았지만, 그래도 자신을 발탁하여 함께 호흡 맞춘 대통령을 저주하듯 궁지에 몰아넣는 행태도 기이하다. 그를 기용한 트럼프 자신의 업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국 현실에서 이상하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국가안보보좌관 경력을 지렛대 삼아 재임 중 벌어진 객관적 사실과, 자신의 '슈퍼 매파'적 판단을 뒤섞어 사건을 다루는 스타일도 장삿속 글쓰기와 매명의 혐의를 벗기 어렵다. 대표적으로 그는 회고록을 통해 작년 판문점에서의 남북미 정상회동 후 북미정상회담을 제안한 문재인 대통령의 생각을 '사진찍기용'이라고 했다. 전지적 작가 시점의 전형적 깎아내리기다. 백번을 양보하여 설혹 사진찍기를 위한 것이었다 해도 남북 분단과 통일 지향의 상징 장소에서 70년 전 적대국의 양 정상이 만나는 이벤트에 한국 대통령이 함께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큰 외교 행위로 봐야 할 것이다. 볼턴은 또, 영변 핵시설 해체 의지를 비핵화의 의미 있는 첫걸음으로 본 문 대통령의 판단을 '정신분열적'(schizophrenic)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공직을 떠난 처지라고는 하나 한마디로 무례한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애초, 지금의 북핵 외교 난관과 남북관계 퇴행의 시발이 된 북미 정상의 하노이 노 딜 원인으로 볼턴의 존재를 지목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비둘기파들에게는 특히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따로 없었다. 노 딜 직후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볼턴 탓에 회담이 망가졌다며 그를 '재수 없는 사람'이라고까지 말한 바 있다. 이번 일이 터지자 더불어민주당 소속 송영길 국회 외교통일위원장도 한 언론 통화에서 볼턴은 국가안보보좌관을 하면 안 됐던 사람이라고 했다. 이들 평가에는 근거가 있다. 북핵 문제 해결을 '리비아식'으로 하려는 볼턴의 경직성이 그것이다. 리비아식의 요체는 핵 동결 없이 전면 포기로 직행하는 일괄타결과 초단기 실행이다. 핵 능력 실재와 국제사회 평가, 지정학 등에서 수평 비교하기가 어려운 북한과 리비아를 똑같이 다루려 하는 것은 무지하거나 무모한 일이다. 북한이 리비아 모델을 거부하는 것 역시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 점에서 볼턴의 등장은 하노이 노 딜과 이후 상황을 암시하는 복선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백악관을 나와서까지 한미동맹을 해치고 양국 신뢰를 훼손하는 것을 두고만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답답하다. 미 정부의 현명한 대처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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